지난 사흘, 일본으로 선교를 다녀왔다.
내게는 다섯 번째 일본 선교였고, 첫 번째 러브소나타였다. 또 처음으로 오이타 시가 아닌 다른 일본을 방문해보는 경험이었다.

지난 선교들
하나님은 내게 2023년부터 일본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셨다. 그건 내 세 번째 일본 선교였고, 극심한 우울 중에 가게 된 선교였으며,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팀원들은 속을 썩이는 선교였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만났으며 존경하는 리더와 함께 해 충만했고 아끼는 동역자들을 새로 사귀게 됨으로 연합하게 된 선교이기도 했다.
이렇듯 하나님은 깨져있는 나를 부르고 건지셨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일본을 향해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됐다.
대학부를 졸업하기 전 마지막으로 간 일본 선교에서 나는 사역팀장이었다. 10년의 생활동안 리더가 몸에 익은 나는 어쩌면 누군가를 인도하는 데에도 익숙했지만 누군가를 훈계하는 데에도 익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훈계와 정죄, 판단과 권면이 받는 이에게 거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실상 거름이 되려면 흘려 보내는 이의 사랑이 필수적이다.
나는 사랑했는가? 언제나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질문이다.
사역팀장으로서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고자 했다. 사람들과 교제하기도 어쩔 땐 벅찬 내가 매일 팀모임을 열고 매일 아이들을 만나고 매일 연습 하도록 독려했다. 남들로부터 지시받음을 자존심 상해하는 내가 누군가 나에게 지시할 때 묵묵히 순종했다. 하나님의 일과 선교의 성취, 씨 뿌림의 완결을 위해서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 이상으로 사랑하기를 ‘거부했다’. 주님 제가 이정도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살갑게 다가가는 건 그만 할래요. 제가 못하는 거, 제가 이만큼까지 주님 생각하면서 노력했잖아요. 그러니까 매사에 친절하게 대하고 아이들한테 먼저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는 건 그만둘래요. 주님, 제가 지난 번에 한 번 주님 생각하면서 참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저 친구가 뭘 잘못했는지는 말해줘야겠어요. 드러내놓고 화내지는 않을게요. 그런데 제 분노가 새어나오면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라 성패가 오직 주님께 달린 일이다. 그래서 26년 겨울의 일본 오이타 선교 역시 은혜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달라지지 못했고 하나님이 내게 하시려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나는 내가 리더로 행세하는 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나머지, 그리고 대학부를 졸업하는 것에 골몰한 나머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구해야 할 매일의 동행에 소홀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를 다시 부르셨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대학부를 졸업했다. 그리고 청년부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공동체에 새로 적응하기. 너무나 끔찍하고도 고된 시간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아끌었다. 순모임과 예배가 끝나면 공허했다. 수많던 지인과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고 그 윤곽만 자욱하게 내 주위에 남아서, 오히려 내가 무엇을 보고 지금까지 신앙을 갈구했는지를 더 사무치게 느끼게 했다. 심지어 공동체에 진입할 때 받은 새로운 비전: 너의 삶의 영역에 나에게 하듯 충실하게 일해야 한다, 로 인해 공동체에 시간의 양동이를 들이붓는 것이 이전보다 더 아깝고 무겁게 느껴졌다. 돈과 시간이 생명수처럼 귀하게 느껴지면서 과거의 나, 낭비벽이 얼마나 심했는지 돌아보게 됐다.
그 때 또 다른 일본 선교가 나를 불렀다.
상황의 제약을 피해 다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느꼈고,
나는 다시 일본에서 주님을 만나 뵙기를 희망하면서, 그리고 어렴풋이 받았던 일본 땅에서의 비전을 기억하면서 선교를 나가기를 주님께 청했다.
The Way, 러브소나타
러브소나타는 내가 지금까지 간 선교와는 사뭇 달랐다.
청년 러브소나타 – 원래의 러브소나타 사역과 구분하기 위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 로 기획된 이번 선교는 TCU(Tokyo Christian University)와 연계해 이어지는 사역이었다.
그런데 놀랍도록, 아무것도 안했다.
선교 사역이란 모름지기 한 달 전부터 모든 팀원과 팀장의 신체와 정신력을 갈아넣어 고운 파우더로 만든 뒤, 얼굴에 팡팡 찍어내야 분칠을 좀 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나는 대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선교의 본질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건 그게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한 선교는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래서 신청부터 가기까지의 두 달여의 기간 동안 단 두 번밖에 모이지 않는 이 사역이 어색했다.
아래는 문답:
저희는 가서 뭘 하게 되나요? – 집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뭔가 특순이라던지, 다른 사역은 없을까요? – 현재로선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현지 교회가 요청하시면 하게 될 텐데, 그게 아니라면 가서 집회에만 참여할 것 같습니다.
안내나 다른 손길들은 필요가 없을까요? – 다 따로 하실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 모여도 되나요? / 뭔가 더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저희가 뭔가를 하도록 요청받거나 하면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 많이 모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11개 공동체가 함께 움직여야 하고 여러 상황을 맞추기도 힘들어서, 한 두 번의 기도회 이외에는 계획된 사항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준비과정에 참여했더랬다.
나는 선교로 일본만을 다녀왔다. 일본 선교사님 왈:
“그거 좀 안 한다고 안 죽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뭔가를 해내려고 하니? 난 너희가 여기에 와서 일본의 풍경과 사회를 더 많이 봤으면 좋겠다. 그래야 너희가 한국 가서 기도할 때 일본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팀장에게) 또 어딜 가려고? 사역하러 그만 가. 이 일정은 빼라. 그래야 너희가 가서 시장도 보고, 사람들 얼굴도 보고, 돌아다닐 시간도 있지.”
틀린 말씀이라고 생각 안 한다. 오히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뭔가를 더 하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뭔가… 뭔가였다.
준비하시고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기도회 때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었다.
러브소나타 준비를 위한 두 번의 기도회.
기도회는 옹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사실 기도회에서 구색의 밀도는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기도회는 자신의 마음을 점검할 수 있다는 데에 주요한 기능이 있다.
나는 평소에 러브소나타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러브소나타는 커녕 일본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 일본에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내 앞가림하기 바쁠 정도로 내 삶은 치열하다.
그런데 자리를 만들어주시면 어째서 일본을 위해 그렇게 뜨거운 기도가 나오는지. 내 친구 개똥이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이렇게 눈물이 흐르고 침이 튀고 목이 쉬진 않을 거다. 나는 성령께서 도우시는 기도를 믿는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내가 일본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기도를 도우셨다.
주님, 일본 땅에 부르신 곳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세워지게 하소서.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 늘어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그물을 던지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능치못함 없음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인도자가 백업찬양을 부를 때마다 찬양을 따라 부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외쳤다. 주여, 일본에도 한국에서 처럼 놀라운 부흥이 있게 하소서.
일본 땅에 부흥이 있으면 뭐가 좋냐고? 그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지. 그것 말고는 득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히터버튼을 3단계로 돌리시는 걸 보면, 내가 일본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기는 하나보다.
이전에 갔었던 일본에서 만났던 하나님은 ‘이미 그 땅에서 열심을 내시는 여호와’셨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날까? 그 땅에서 우리를 만날 것을 미리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천천히 준비시키고 계셨다.
내 기대의 계수가 0에서 양의 방향으로, 조금씩 가늘고 느리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뭔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기 전 마지막 순모임, 순장님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묻는다.
“OO이는 이제 이번 주에 일본 가는데, 기대하는 바가 있어?”
전심으로, 내 기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온 마음을 다해, 뛸 듯이 기쁜 반짝거리는 눈빛을 전방에 발사하며 내가 생각하고 예상하고 기대하는, 감격스러울 성령의 일하심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 내 마음에 없는 건 말할 재주가 내게 없기 때문이다.
“아뇨, 글쎄요… 그닥… 몸 성하게 잘 다녀와야죠.”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대학부 수련회,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은혜가 있었다. 4번의 일본 선교, 최선을 다하지만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은혜가 있었다. 수많은 리더 사역, 기대가 없었고 아이들이 나에게 상처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말씀으로 해산하고 나니 이 아이들이 누군가를 낳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열매를 보여주셨다. 마찬가지로 은혜였다.
현재 내 기대 계수: 0.5~0.8? 100점 만점이다.
출발하기 전 날 밤과 당일 아침
열심히 짐을 싸던 나는 수많은 이동시간에 책이나 읽을 요량으로 –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할렐루야 – 읽다만 서적들을 뒤적거리다,
두 달 상간에 열 페이지씩 들춰보고 있는 히브리서 주석을 꺼내 든다.
나는 성경에서 히브리서를 가장 좋아한다. 저자의 신비성 –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 이 나를 매료시킨다. 그의 신학적 논리가 나를 매료시킨다. 물론 이 사람이 말하는 걸 난 다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뭔가 어려운 건 멋있어 보이잖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나 자신을 세뇌시킨 뒤, 그 후로 서점에 가면 히브리서 주석이 있는지 기웃거렸다. 그런데 인기가 없는 성경인지 잘 없더니, 어느 날 검은색 표지에 책장부분마저 검은색으로 칠해진 멋있는 책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게 아닌가. 크으 – 간지난다. 바로 집어들어 결제하고 그 뒤로 창고행이 됐다.
문제는 주석의 저자가 쓰는 말들이 너무 어렵고 문장들도 난해하다는 거다. 물론 – 엣헴, 나 정도 책을 읽는 사람에게 이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지만 진행이 잘 안되다보니 흥미를 상실하게 된 안타까운 나. 어쩔 수 없지. 이거나 한 번 읽어볼까? 이 참에 해치울 수 있으면 해치우자(난 책을 퀘스트 깨듯이 읽는다. 말 그대로 독파).
이게 불러올 후폭풍은 전혀 몰랐다. 역시 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놀랍게도 보이는 것만 믿지 말고 그 너머의 세계를 볼 것을 요구하는 성경이 히브리서임을 생각해본다면, 나와 내 자아는 회고를 거듭할수록 하찮아진다)
첫 번째 은혜 –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며칠이 지나고 쓰는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라.
이제부터 기억나는 순간을 기록할텐데, 주로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 흘리는 저자를 상상해주시며 읽으면 좋겠다. 이 외의 은혜는 일반은혜(날씨가 말도 안되게 쾌적했다. 덥지도, 습하지도 않았으며 우리가 돌아다니는 시간에는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숙소는 최고였다. 침대가 있었고, 냉방시설이 있었고, 두 사람 혹은 한 사람이 한 방을 사용했다 – 물론 나는 두 사람 방이었지만 불만은 없다. 동행인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님께서 내 연약함을 아시고 친밀한 이들을 붙여주셨고 심지어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지 않았던 분들과도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또 친밀하지 않았던 분들과 친밀할 수 있게 되는 은혜, 선교 때 핸드폰이 가능했던 은혜… 모두 일반은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의 편의를 봐주시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 써주시는 분이시다)말고는 기억이 안난다.
청년 러브소나타가 시작됐다.
나는 순차통역을 안 좋아한다(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 설교는 순차통역 – 설교자가 한 문장을 말하면 통역자가 문장을 번역해주는 방식 – 으로 진행한다. 아니, 설교 뿐만이 아니라 기도와 모든 순서를 다 그렇게 진행한다. 아, 찬양은 아니구나. 찬양은 그냥 일본어로 하더이다. 일본어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눈뜬 장님으로 영문음 가사를 따라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일본 선교를 4번 다녀왔다. 갈 때마다 무조건 특순을 하기 때문에, 일본어 찬양을 몇 곡 알고 있다. 그렇게 달달 외운 찬양은 뇌리에서 잘 떠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찬양 중에 ‘의미’를 알고 있는 찬양은 몇 되지 않는다. 찬양의 의미를 알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맞아야 한다.
- 작사가가 있거나, 최소한 곡의 의미에 대한 정보가 담긴 스크립트 등이 있어야 한다.
- 1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일어 가능자가 곡의 의미를 해설해주어야 한다.
- 한국어와 일어 가사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일어 가사는 한국어보다 그 의미가 담백한 경우가 많다(이건 개인적 의견).
2의 경우는… 한번 사람들을 앉혀놓고 가르쳐주면 좋겠지만 그런 여유는 잘 허락되지 않아서, 아는 찬양에 비해 그 의미까지 아는 찬양은 현저히 적다.
내가 의미를 아는 찬양은 ‘세상 모든 민족이 + 물이 바다 덮음같이’를 결합한 아이자야 씩스티원의 일문 버전이다. 그 이유는 팀에 작사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작사가가 우리 모두를 앉혀놓고 화이트보드에 2시간동안 곡의 의미를 음절과 단어와 간지별로 풀어가면서 설명해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찬양은 ‘주님의 선하심’의 일문 버전인데, 이건 26년 겨울 선교 때 모두가 귀에 딱지 앉도록 외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인도자가 주님의 선하심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26년에 합창팀장을 했던 친구가 떠올랐고,
그 곡을 외우기 위해 모두가 둘러 앉아 서로 시험봐주던 순간이 떠올랐고,
스바라시에서 갑자기 커지던 목소리들과,
맹인시설에서 동시에 흘렸던 눈물들과,
천리교 교당의 들보가 흔들리도록 거세게 선포했던 우리들의 목소리와,
가사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찬양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아시고 이 곡을 철저하게 암기하게 하신 하나님의 준비성이 생각났다.
주님의 선하심은 나를 인도하신다. 나를 인도하는 주님의 선하심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주님의 선하심을 암기할 때 이게 내 7월의 러브소나타를 위해 사용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숨쉴 공간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이 곡을 미리 준비시키셨다. 그래서 내가 가사를 묵상하고 당신의 이름을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선하시다.
두 번째 은혜 – 기대없음을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
유메 컨퍼런스는 미안하지만,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다.
계속 무작위 사람과 대화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있었다. I인 나는 너무 괴로웠다. 심지어 시작하기 전에 주님, 제가 말해야 할 사람이라면 말할 수 있도록 담대하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했는데도 막상 그 상황에서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도망쳤다. 뒤에서 간식으로 나온 과자들을 까먹으면서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에너지가 바닥났는지, 그 다음 전체 예배 시간에는 아주 푹 졸았다. 옆에 있는 공동체 형한테 민망할 정도로. 아 참, 설교와 기도가 순차통역이었다.
저녁은 준 자유시간이었다. 정확히는 조별로 돌아다니면서 저녁을 먹고, 20:30 이후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시간표였다. 20:30까지 너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8시반이 되자마자 ‘저는 들어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고 숙소로 빠르게 퇴장했다.
들어와서는 히브리서 주석을 읽었다. 목욕하고 혼자서 책 읽는 시간이 어찌나 좋던지! 사람들이 왜 이걸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둘째 날이 저물었다.
두 번째 은혜는 셋째 날 찾아왔다.
버스를 타자 목사님께서 냅다 우리에게 사과를 하셨다. 이유인즉, 상황이 많이 바뀌어 설교가 순차통역이 아닌 동시통역으로 이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모두는 로밍을 한 핸드폰을 지니고 있었고, 이어폰이 없는 몇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어폰이 있었다(참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보이스룸이라는 카카오톡의 기능을 이용해 동시통역으로 설교를 듣게 됐다.
사과하실 것 까진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동시통역으로 듣는 건 한 번도 안해봤지만,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숙소에서 교회는 50분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 우리는 짐을 놓고 하차했다.
아뿔싸 – 내 친구는 차에 핸드폰을 두고 내리고, 나는 차에 이어폰을 두고 내렸다.
내 친구는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혔고, 나는 설교를 못듣게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버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내 친구는 로컬 일본인이나 마찬가지여서 이어폰 없이 설교를 들어도 이해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친구가 내게 이어폰을 빌려주기로 극적 합의를 이루었다. 옆에 있는 공동체 형이 둘이 결혼하라고 놀렸다. 어쩜 그렇게 딱 맞게 놓고 오냐며.
이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훨씬 선하신 분이었다.
설교가 시작됐다. 목사님-일본인께서 친절하셔서, 우리한테 한국어로 해석된 강단까지 나누어주셨다. 참고해서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라는 뜻이시겠지? 미리 접한 설교의 내용은 – 주님, 죄송합니다 – 좋은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좋은 말들. 특별한 메시지 말고, 좋은 말들.
그런데 막상 설교를 듣고 있노라니,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심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 한국이 아니라 일본 교회에 있는데 하나님은 내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씀하고 계셨다. 분명 내가 모르는 지식이 아니고 처음 듣는 말이 아닌데, 하나님은 내게 그것도 직접 말씀하고 계셨다. ‘너의 삶에 신실하게 거하는 나를 믿어라’, ‘성령을 알지못하는 자가 되지 않고 받도록 구해라’, ‘일본 땅에 내가 일할 것을 믿어라’, ‘너희의 일본을 향한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라’, ‘너희의 연약함이 내가 임할 통로가 될 것임을 믿어라’,
기대 없던 내가 생각났다. 어찌나 기대를 안했던지, 이어폰을 들고 내려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나였다. 그런데 내 기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이 마음에 말씀하신 것, 그게 내게는 은혜였다. 일본 목사님이 ‘한국에서 우리 일본을 위해 많이 기도해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힘이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일본의 수많은 영혼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의 기도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진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너희는 기도를 멈추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일본의 영혼을 향해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눈을 통해 울고 계셨다.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교를 통해 내가 은혜받을 줄 상상도 못했던 나는 코를 닦기 위해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동시통역은 너무나 은혜로웠고, 이 때 나는 순차통역이 싫어졌다. 그리고 순차통역을 들으면 조는 내 친구가 이해가 갔다. 같은 말을 두 번씩 들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마지막 은혜 – 히브리서의, 용서치 못할 죄인
나는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히브리서 주석을 읽었다. 아마 옆에 있는 분들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표시하면서 읽는 편이어서 책을 읽으려면 테이블도 있어야 하고 펜도 있어야 하고… 아무튼 좀 제약이 많다. 또 사람이 많은 것보단 없는 게 좋고, 아는 사람보단 모르는 사람이 좋다. 자의식이 너무 심해서 아는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는 책을 잘 안 읽는다. 상대가 지루해하는게 신경 쓰이고, 그 사람이 말이라도 걸라치면 내 책읽는 멋진 모습이 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더 신경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책 읽는 데 애로사항이 많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히브리서 주석을 다시 폈다. 믿음의 선조들을 설명하는 11장 주석을 읽을 차례였다. 틈틈이 읽은 덕분에 나는 책을 거의 다 읽었고, 아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끝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귀국 시간대가 저녁이었다. 보통 비행기에서는 굿나잇하라고 실내 조명을 꺼준다. 다만 승객이 책을 읽고 있으면 승무원이 조명을 켜준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히브리서 주석위에 환하게 조명이 꽂히고 있었다. 부담스러워라;; 다행히 바로 옆자리에 승객이 타지 않았다(오며 가며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었다. 할렐루야). 나는 통로쪽에 앉았기 때문에 창가쪽에 앉은 분만 신경쓰였다. 아, 물론 복도를 건너 반대편 좌석에 있는 분과 그 뒤에 있는 부부도 신경이 쓰였다. 다른 공동체 다니시는 신혼부부셨는데, 나랑 회전초밥 집에서 어쩌다보니 식사를 같이 하게 돼서 얼굴을 아는 사이가 됐다. 오며 가며 착한 나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낯을 가리시는지 먼저 인사를 안하시더라, 흑.
히브리서 주석을 읽는 멋진 나 (혹은 그냥 독서를 하는 멋진 나)를 의식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도 히브리서를 읽으며 기도하곤 했는데, 특히 믿음 장은 내 눈물 버튼이었다. 어느 정도로 자극이 잘 되냐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구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땅에서 외국인이며 난민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본향을 추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히브리서 11:13-14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을 공격하셨다. ‘나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해도 멀리서 그것을 보고 환영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고, 더 나은 본향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주변에서 보는 이들을 어찌할꼬?
주석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상황에 잇대어 말하자면, 신앙의 본류는 현실의 성공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현재의 상실과 실패를 자처하는 용기가 신앙이다.‘
나는 요즘 결혼 때문에 고민이 많다. 내집마련의 꿈을 실현하고 싶고, 자산가치가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는 현 세태가 불안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모님의 그늘 아래에서 얄팍한 경제 지식 하나 없이 살아온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으이구, 이 멍청아, 인문학 책을 읽는 열정으로 부동산 공부를 했으면 지금 뭐라도 됐겠다’ 불안과 초조함이 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나는 지금이라도 뭐라도 알아보기 위해 내 마음의 초점을 조금씩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의 상실과 실패를 자처하는 용기’, 그 용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석가는 이어서 적는다. ‘ 우리는 “하늘 본향”을 갈망한다. 그 갈망은 이 땅의 삶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사는 방식을 규정하는 방향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 본향을 갈망함이 안일하고 나태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의 일들로 이 땅에서의 삶을 해석하는 시선을 지니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모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할 필요도 초조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처분과 선하심이 공의 가운데 행해질 것임을 믿을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순간에 관해 기록한다. 그리고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의 독특한 신학적 논리가 드러난다(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길).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이삭의 결박’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리고 그 분은 선하시다. 이는 히브리서 11:6이 기록하는 바 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부분을 곱씹어 생각하다가(여전히 울고 있다), 아브라함이 먼저 두 사실을 믿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하나님은 사라의 태를 열어주시고 아브라함의 생식능력을 회복시키셨다. 그래서 그는 이삭을 얻었다. 이삭이 제물로 바쳐지는 사건 당시 이삭의 나이는 청소년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15년의 시간 동안 그는 하나님께 실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내게 15년이라면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다 까먹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근거가 희미하고 흐릿해졌을 법 한데도,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무조건 선하시다’라고 생각했다. 자기 앞에 살아 숨쉬고 만져지는 증좌가 있어서 믿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연약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연약하다. 이 사실이 너무 견고해서 어쩔 때는 이 문장이 우리를 휘두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장이 우리를 휘두르게 놔두기도 한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을 격려하시는 분이 있다. 우리에게 완주가 있음을, 온전하게 됨이 있음을 일깨우는 분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우리를 쉽게 덫에 빠뜨리는 죄를 떨쳐버리고 인내하면서 우리 앞에 있는 시합에서 달립시다. 또한 믿음의 선도자이자 완결자이신 예수를 주목합시다. 그는 그의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수치를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십자가를 견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이 그분 자신을 향해 행했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적대 행위를 견디셨다. 이건 그가 받으신 고난의 본질이었다. 우리가 받을 고난의 본질이 다를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는 ‘우리를 향한 대적함’이 반드시 있고, 수치와 경멸과 가난함과 멸시받음과 비천해짐과 낮아짐이 반드시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들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그 믿음을 완성하셨다. (여전히 울고 있음)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갈 때 트랙을 따라 달리게 되고, 트랙의 끝에 다다랐을 때 완주, 하게 된다. 완주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이심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온전함은 예수의 온전함에 반드시 기대어 있다.
원래 이쯤하면 이제 눈물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여러분은 그분이 아들들에게 하듯 여러분에게 했던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말아라.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고 자녀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들처럼 대하셔서 내리는 훈육이라 여기고 견뎌내십시오. 아버지가 훈육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훈육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자녀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5-8
내가 혼나고 괴로웠던 모든 순간, 양심에 가책을 받았던 모든 순간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러나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순간에도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다시 일어나라고 부르신다.
그게 다 우리를 자녀로 생각하시지, 사생아로 생각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녀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단련된 이들에게 나중에는 평화로 가득한 열매를 의로움으로부터 가져다 줍니다. 히브리서 12:11
제가 정말 단련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이 훈육에 끝이 있을까요? 저는 혼나도 변함이 없고, 넘어지는 곳에서 동일하게 넘어지지 않습니까? 제가 이에 대해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단련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마지막 눈물의 구간.
아무도 에서처럼 음란하거나 세속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는 음식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 넘겼습니다. 히브리서12:16
이제까지는 한 번도 의식해서 읽지 못했던 구간이다.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팔아넘겼다. 그 댓가로 그는 팥죽 한 그릇, 당장의 허기를 달랠 음식을 얻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능멸하고 하찮게 여겼으며, 그의 가치관의 기준은 지극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구 충족이었음을 보여준다… 라고 주석가는 적었다.
나는 에서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내 신체의 편익과 편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해 다른 것들을 저버렸던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에서는 아마 장자권을 팔아넘길 때 자신이 하나님을 능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무지로써 면죄될 수 없다. 이미 그의 육체적 편익이 그의 최우선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삶의 왕좌에 올려놓고 있었다. 자신이 편하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다보니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 자가 에서였다.
이 말씀은 내게 너무나 충격이었고, 내 인생에 대해, 또 내가 부르짖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주인된 삶을 살고자 한다며? 그러나 나는 편하다는 이유로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선택한다. 허기가 질 때 간식거리를 찾는다. 그러다보니 성령의 전인 내 몸이 조금씩 망가지는 게 느껴진다. 금욕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함이 아니다. 어떤 금욕이든 하나님보다 앞서면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처럼, 내 삶의 편익도 마찬가지다. 나는 편리함을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당장 이 블로그를 만든 동기가 된 리습도, 손가락 여러번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다. (아직 울고 있음)
내가 은혜를 이렇게 기록함은, 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써놓은 글을 다시 잘 들춰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이 마음을 얼마나 유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눈물을 닦으면서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이 사람들의 시선보다 그 순간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거구나.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낙심하게 되지만 성령이 시킨 일을 했다면 좌절할 필요가 없다. 성령이 눈물 흘리시게 했다면 비행기에서 다 큰 남자가 훌쩍거리는게 무슨 흠이겠는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Jokes on You, 할 일이다.
하나님은 내 삶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당신에게 돌아오길 바라신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같은 자리에서 계속해서 나를 부르신다. 그 부르심을 더 잘 듣도록 귀를 여는 자가 됐으면 좋겠다. 그게 이번 묵상의 최종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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