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자입니까 /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 읽은 기간: 261002-261005

이 책이 하는 말
성경의 약속은 오직 하나로 귀결된다. ‘성령을 보내리라’. 우리는 지금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쩐지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대로 사역하거나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이 시대에 정말로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제자가 되려면 우리의 어떤 지점들이 변혁되고 바뀌어야 하는가?
나에게 걸린 것
책의 전반에 걸쳐 ‘좋지 않은 예’로 제시되는 대목의 곳곳에서, 나는 내 모습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출간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주는 교훈은 통렬하고 그만큼 아프다. 내 마음을 직격하는 이 말들은 지금까지 내가 신앙생활, 또 생활의 신앙을 감당해온 모든 측면에 있어서 내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는 어떻게 신앙 생활 하고 있었을까? – 주님이 주신 승리도 있었지만, 대개는 내 생각대로, 그러므로 대단히 잘못 하고 있었다. 주님은 그런 나를 기다려주시고, 또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대목으로서 이 책을 내 행로에 놓아두셨음을 느낀다.
무엇: “노예여, 무슨 권리가 있다고? 당신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셨고, 당신의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다.”
왜: 나는 내 안에 나의 소위 ‘민주적’이라고 하는 자아가 얼마나 강력하게 살아있는지를 느꼈다. 나는 ‘자기 권리’에 대해 강력하게 부르짖는 세대에 태어났다. 물론 이 권리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부르짖음 위에 세워진 권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권리를 전 인류에게 그 인류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 결과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다. ‘내게는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침해하지 못한다’ ‘나는 내 권리를 위해 싸워야하고 그것의 정당한 수행을 지켜내야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나로 하여금 ‘주님도 이것을 침해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니, 주님께서 그 범위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실 때 그것을 ‘침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실제로 이 구절을 촬영해 많은 이들에게 보냈는데, 달가워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내게도 이 사실은 너무 불편했다. 주인이 누구냐는 이미 중요하지 않고, 내가 ‘노예/종’이라는 사실, 누군가 내게 명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껏 ‘주님’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내가 주님을 진짜 내 주인으로 여기지는 않았던거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예수님이 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노예 생활을 해보지 않은 나는 피상적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피상적으로 반응했다.
무엇: 성경에서 ‘빛’은 보통 진리로 사람들이 이해하지만, 이것은 ‘사랑’에 더욱 가깝다.
그래서 ‘어두움’은 빛의 결핍, 곧 사랑의 결핍을 말한다.
왜: 이 관점에서 성경의 말씀들을 읽으니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행함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행함이다. 물론 공의의 하나님은 진리가 곧 사랑이시지만, 그냥 우리가 직관적 감각적으로 어휘에 대해 이해하는 바를 적용해보면 이 둘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랑 안에서 행하면 우리에게 친교와 사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형제 중 누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더라도 다른 한 사람이 사랑 안에서 행한다면 그 사랑이 어두움을 결국은 몰아낼 것이다. 둘 다 빛 안에서 행한다면 두말할나위가 없을 것이고. 나는 사랑으로 행하기를 원한다.
이 관점으로 계속보자.
무엇: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왜: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은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엄격하고 진리 안에 있는 자로 굳센 자가 되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의 진리와 명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군.
무엇: 공산주의는 사회정의와 균등분배에 대해 아주 좋은 이론을 제시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와 상치된다. 은사제일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은사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왜: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 혹은 좋다고 여기는 것들, 즉 찬반이 갈리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들은 적어도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다. 일말이란 ‘하나의 끝’이다. 즉 전체에 있어서 한 부분이다. 나뭇가지의 한 끝은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나무의 큰 줄기(trunk)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부분에 대한 좋음을 전체로 확장시키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 그 확장을 당연하게 할 수 있을까? 마치 교회는 죄인의 집단이어서 각양의 선하지 않은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라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내야 할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할 것들이 늘 존재한다.
무엇: 그러므로 우리는 회합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주님, 저는 이 도시의 목사 두명, 혹은 세명을 사랑하겠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이름을 적습니다. 전 아직 그들을 모릅니다. 전 그들의 신학 노선을 반대해 왔습니다만, 사랑하라고 하시니까 이제 그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형제님, 당신 말이 옳습니다. 사랑은 명령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멍청한 생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것들을 그대로 시행해서 하나님께 아뢸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형제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허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내 순종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이런 기도를 많이 해왔다. 이 목사님은 그냥 찾아가서, 대화하고,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이들과 교제하고, 이 사람들 위해서 같이 기도해주는 걸로 사랑했다고 했다. 사랑에는 방법이 없다. 내 마음을 그냥 저 사람을 향해 들이부으면 된다. 그런데 그걸 하기 싫어서 “주님, 순종할 마음을 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해왔다. ‘멍청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무엇: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벽돌이다. 우리는 더 많은 벽돌들을 모으기 위해서 애쓴다. 목사들도 보다 많은 벽돌들을 우리의 공사 현장으로 가져오려고 애쓰며 복음사역에 힘쓴다.
왜: 그렇다. 우리는 벽돌이다. 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양들도 벽돌들이다. 벽돌의 쓰임새는 축조에 있다. 벽돌은 쌓아서 벽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벽’‘돌’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벽돌을 모으기만 할 뿐, 벽돌들의 원래 쓰임새가 무엇인지는 말해주거나 알려주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냥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출석하는 걸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치지 않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도록 우리 자신을 자꾸 흔들어 깨워야 한다. 벽돌을 모아놓기만 하고 쌓지 않으면 그건 온전한 구조체가 아니라 벽돌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 예수님도 열두 명의 제자만 양육하셨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를 양육하시고, 제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셨다. ‘이제 내가 안심하고 승천할 수 있겠구나. 이 땅에 올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너희가 세워나갈 수 있다’. 예수님은 결코 500명, 600명의 제자를 양육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공동체 모두가 예수님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끔 하시기보다, 열두 명의 제자가 또 다른 제자들을 양육하고, 그 제자들이 제자들을 양육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셨다.
왜: 우리가 목사님 한 분만 바라보면서 교회를 다니게 되면, 목사님은 그 모든 이들을 다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단단한 음식’을 먹도록 자라나기가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의 질서 안에 세워주신 우리의 리더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 리더들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이 그들을 믿어주셔서 리더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성이 너무 중요하고, 내 권리가 너무 중요한 나머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그 권위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내 생각과 다르면 고개를 돌려버린다. 내가 아는 하나님과 다르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다. 복종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적용
내 리더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내게 보내주신 사람을 사랑하자.
나는 100명을 사랑할 수 없다. 한 번에 한 명을 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자.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자. 진짜로 인정하자. 내가 내 쉴 권리를 하나님 앞에 주장하려고 하지 말자. 하나님이 쉬라고 하시면 – 그 분은 쉬라고 하시는 분이다 – 그 때 쉬자. 나는 무익한 종이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다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자.
만나는 사람들을 선하게 대하고, 먼저 인사하고, 가능한 애정의 표현, 사람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표식을 남기기. 무응답, 무대응으로 대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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