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이렇게 쓰기가 싫을까?
수련회 이전
별 기대 없이 수련회에 참여했다. 무언가를 기대하기가 내게 참 어려워진 것 같다. 어떤 것을 기대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벌어진 일에 대한 감사는 있지만,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다. 왜 그렇게 된 건지 궁금하긴 하다.
일정에 양재경 목사님이 있는 걸 봤다.
이전에 몇 번 설교를 들어봤는데, 그렇게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첫째 날 설교도 별로 기대가 안 된다.
나머지 연사분들은… 모르는 분들이다.
찬양팀 라인업이 3일 내내 들어가 있는 걸 봤다.
쉽지 않겠군… 목 관리가 벌써 걱정된다.
목이 요즘 쉽게 쉬고 회복이 점점 늦어지는 것 같은데, 3일 내내 성한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부딪혀봐야지. 스트렙실 사 가야겠다.
티셔츠를 한 장밖에 안 산 게 마음에 걸린다.
긴축 재정 중이라, 12000원 티셔츠를 한 번 더 사기엔 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라인업을 설 때마다 티셔츠를 입고 서야 한다니…
같은 옷을 세 번 입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다. 추가 구매도 안 된다고 하니 이것도 부딪혀봐야 한다.
하늘이 형이 먼저 자기 차 타고 같이 가자고 해 줬다. 감사하다.
퇴근하고 잘 갈 수 있을지, 모르는 분들이랑 카풀하면 숨 막히는 어색함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들었었는데, 하늘이 형이 먼저, 운전도 못하는 나를 위해 같이 가자고 해주다니 고맙고, 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 길에 올리브영도 들러야 했었는데 하늘이 형이 흔쾌히 배려해 줘서 들를 수 있었다.
다만 길이 너무 막혀서 5시 반에 출발했는데 수련회 장소까지 두 시간 걸렸다.
시간 늦는 게 마음에 너무 걸려서 불편했고 살짝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는데,
교통 상황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거니까, 하고 마음을 잘 접었다.
늦게 도착하는 몇몇 사람을 위해(나 포함) 시작 리허설을 연기해 준 본부에게 또 감사했다.
첫째 날 저녁
➀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강도.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면, 문지기가 질문한다. ’당신은 왜 오셨습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는 천국으로 입장할 수도, 영원히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강도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자도 아니고, 복음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그러니까 천사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오실 메시아에 대한 구약 성서의 지혜를 물어봐도 강도는 모를 수도 있다.
강도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저는 저랑 같이 계시던 분이 같이 있을 거라고, 오라고 하셔서 왔는데… 요‘
’이게 복음이다‘
우리가 어떻게 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분이 오라고 해서 왔다‘
이게 복음이었다. 다른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하나만 붙잡고 예수님의 말씀 하나만 보는 것.
➁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 3:16)
말씀을 3분할한다.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1)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무언가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 우리가 하나님한테 독생자를 주십시오, 요구한 적 없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셔서 먼저 보내주셨다.
그런데 이 은혜, 하나님의 선행우선을 보면 은혜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당대의 모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예수님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신성모독의 죄를 지어 나무에 달렸고, 극형 중에서도 극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2)’저‘를 믿는 자마다
여기서 ’저‘가 무엇인가. 독생자?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의지다. 하나님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내 삶에 주고자 하시는 것,
1과 2를 연결해 보면 이렇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결과를 다 아는 우리는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값없고 또 한량없는 은혜를 먼저 생각하지만, 당대에는 이게 아주 심각한 저주였다.
그러므로 저주의 순간이 은혜가 됨을 알아야 하고 – 그 은혜가 곧 하나님의 의지와 비전, 목표와 뜻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세계관으로 로마서 말씀을 본다.
➂
3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우리말 성경)
⮑ 다이어그램을 도출해 보자면
환난 → 인내 → 연단 → 소망
환난을 견디어 냄(인내)으로써 그것이 연단이 되고, 그것이 소망으로 이어진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 그걸 견뎌내야
→ 그게 연단이 되고 (자기 단련이 되고)
→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도구(소망)가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이 모두가 보기에 저주였다.
그 저주를 견디신 예수님은 복음의 소망을 이루셨다.
➃ 이 세계관으로 요셉 이야기를 본다.
요셉이 처음 당한 고난은 형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더 나아가 노예상에게 자기를 팔아넘긴 것이다. (저주)
우리가 요셉이라면, 우리가 가장 먼저 했을 기도는 무엇이겠는가?
‘주님, 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죠?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주세요.‘ → 요셉에게는 악독한 형들이 있었지만, 그를 편애하는 야곱-아버지도 있었다
’제가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부당한 처우를 왜 받습니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으리라.
이를테면 야음을 틈타 담을 넘어서 노예로 팔려간 집을 탈출해, 걸어서 애굽을 탈출해 자기 나라,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다 – 절대 두 발로 살아서 도망칠 수 없다. (저주)
이제 요셉은 꼼짝없이 노예 생활할 일만 남았다. (저주)
우리가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가능한 최소한만 일하고, 우리 육신의 안식을 어떻게든 얻어내기 위해 애쓰는 소인배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요셉은 노예 생활을 감당했다. 그것도 열심히 감당했다. 최선을 다했다.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하게 됐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사람인 주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3 요셉의 주인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가 하는 일마다 여호와께서 잘되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4 요셉은 주인의 눈에 들어 가까이서 그를 섬기게 됐습니다. 보디발은 그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자기가 가진 것을 다 관리하게 했습니다.
(창세기 39:2~4, 우리말 성경)
⮑ 하나님이 진짜… 마치 노예로 열심히 일하기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요셉이 노예로서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신다.
이렇게 해야 보디발의 아내의 눈에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최고 권력자의 아내이자, 나라의 모든 사치와 향락을 손가락 두 마디 너머에 거느리고 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자기 노예에게 눈을 돌리겠는가?
요셉이 외모적으로 매력적이었으니까! 그가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결과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요셉은 투옥되고, 그래야 관원장들을 만나고 그래야 총리가 된다. (의지, 비전, 소망)
이 모든 이야기에서
- 하나님의 은혜는 ‘노예로 팔려가기‘ → ’집으로 못 돌아가고 노예 생활 열심히 하기 (실제로 요셉은 400년 후 출애굽기의 시대에 자기 집으로 비로소 돌아갔다)‘ → 억울한 누명 쓰기 → 감옥에 갇히기 → 죽을 위기를 무릅쓰고 최고 권력자 앞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꿈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구성된다. 모르는 사람이 요셉의 삶을 보면 불행과 저주 투성이다. 그런데 이게 은혜다.
-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요셉의 총리직을 이루신다 (소망) → 그리고 이후에 이스라엘을 기근으로부터 구하시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그건 나중 일이다.
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지?
우리는 환난이 닥치면 일단 드러눕는다.
아 주님, 환난을 치워주세요, 옮겨주세요, 피해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인내하려고는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내해야 그게 연단이 되어 하나님의 소망에 쓰일 수가 있다. 그러니까 견디고 버티는 게 삶에서는 필요하다. 하나님이 너를 쓰기 위해서 너를 굴리시는 거다.
➅ 말씀을 하나님 관점에서 보기 -1
4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4~5, 우리말 성경)
⮑ 우리는 말씀을 보면 ‘내가 주님에게 진짜 잘 붙어 있어야 하겠구나’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음.
그러나 포도나무를 본 적 있는가? 포도나무는 넝쿨처럼 생겼다. 포도나무의 ‘나무’ 부분은 땔감으로 쓰일 가치도 없는 나무고, 형상도 기괴해서 목재로도 쓰지 못한다. 포도나무의 유일한 가치는 나무가 아니라 ’포도 열매‘에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가치를 우리에게 두겠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으시고, 나한테 붙어 있는 너희들에게 내가 모든 가치를 바치겠다, 라고 선언하고 계시다.
➆ 십자가를 지라.
24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복음 16:24, 우리말 성경)
⮑ 올해 우리 교회 표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부담스럽다.
생각해보니 주님은 기껏해야 6시간 매달려 있으셨으면서 우리한테 일평생 이걸 매고 오라고?
뭔가 불공평해 보인다.
십자가는 당대의 극형이었다. 형벌이 너무 잔인무도하기 때문에 당대에 로마인에게는 십자가형이 없었고, 이방인에게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는 더 이상 죄악의 형틀이 아니라
구원과 예배의 표징이 되었다. 즉 예수님이 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나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하나님을 삶에서 예배하라는 말씀이다.
➈ 하나님이 우리를 혼내시는가? 떠나시고, 꾸중하시고, 감정적으로 구시고, 협박과 위협을 일삼으시고, 우리를 거절하시겠다고 엄포를 놓으시는가?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살린 영혼을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신다. 절대로.
그 영혼이 죄 좀 짓고, 우상숭배 좀 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잠깐 등 돌리고, 매번 다시 돌아와서 머리를 긁적거린다고 해서,
절대로 그 영혼 포기하지 못하신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잘못한 것만 엄마 앞에서 크게 보지만, 엄마는 우리 아들, 뭐 불편하거나 어려운 게 없을지를 먼저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부모가 되게 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이해하라고.
(사실, 말씀을 하나님 관점에서 보기 -2, 3이 있었는데 기억이 다 소멸했다… 너무 아쉽다. 기억나면 또 쓰겠음)
둘째 날
간밤이 너무 은혜로웠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이 수련회 가운데 있음이 느껴졌다.
배우 진선규 집사님이 오셔서 간증 토크쇼 진행함.
➀ 일단 아내를 사랑하심이 너무 느껴졌고,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심이 느껴졌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의 선함이 느껴진다고 말할 정도.
➁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 일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는 게 느껴졌고, 자기 일에 자긍심이 있어 보였다. 이런 모습이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내게 내 일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주시고, 그 일의 모든 순간을 사랑할 수 있는 애정을 주세요.
➂ 그에게도 긴 무명 생활이 있었고, 그동안 대중의 사랑을 덜 받았다. 그러나 범죄도시라는 영화의 배역으로 유명세를 타게 됐고, 그게 오늘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무명 생활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지도가 급등하는 순간에 하나님 앞에 예민하게 반응해 바로 하나님께 엎드렸다. 그는 자기를 세운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았다. 즉 그는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지도가 급등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더 선명하게 보는 시선을 얻었다. 그래서 인지도가 올랐을 때 그 무엇보다도 먼저, 심지어 자기 이미지에 대해 묵상하는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일을 형통하게 하시고, 또 자기 일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자기의 가정과 더 나아가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복을 열어주셨다.
➃ 그리고 그의 간증은 앞서 이야기한
환난 → 인내 → 연단 → 소망의 다이어그램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아내인 박보경 배우의 재취업 스토리도 마찬가지.
둘 모두 환난을 환난이 아니라 은혜로 받아들였다.
➃ -1. 진선규 배우는 자기의 무명 생활을 견디면서, 그 과정 중 다른 사람이 잘 되는 모습을 볼 때 부러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무대에 서는 순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결혼해서 식료품 하나 살 돈마저 똑 떨어졌을 때도, 괴로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이 좋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여전히 하나님 안에 머무르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➃ -2. 박보경 배우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부부 배우로서, 내 꿈을 포기할 것인가, 남편의 꿈을 포기하게 할 것인가. 두 꿈 다 어느 하나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었고 모두 존중받아 마땅했다. 박보경 배우는 자기의 꿈을 내려놓고 자기가 엄마의 역할을 감당해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걸 입술로 자기 남편에게 선포했다. 남편은 이후 평생 고마움과 미안함을 안게 됐다. 그녀는 의연하게 엄마가 되기로 했고, 8년간 쉬지 않고 아침 9시마다 1.5~2시간씩 기도하면서 육아를 해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하고 미뤄두었던 자신의 꿈을 위해 오래 쉬었던 오디션을 다시 봤을 때, 그녀는 넘어서기 어려워 보였던 높았던 자기가 지닌 스스로의 연기의 벽을 덜어내고 ‘레이디 두아’ 역할에 발탁되었다. 진선규 배우가 대언하기로는,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오히려 더 배우로서 정련된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박보경 배우가 엄마를 하기로 선택했을 때, ‘나는 엄마를 함으로써 배우를 더 잘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본인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은 일반적으로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놀라운 방식으로 경험과 인생을 사용하셔서 그녀에게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셨고, 결국 수상까지 하게 하셨다.
➄ 진선규 배우는 무엇보다 자기 삶에 벌어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했다.
그는 어렸을 때 또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고 친구들은 그를 학대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함으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겸손함을 가르쳤다. ‘선규야, 우리가 가진 게 없으니 어딜 가더라도 인사 한 번이라도 더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뭐 하나라도 할 때 널 생각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소위 일진들이 그를 학대함으로 그는 견디다 못해 체육관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자신이 운동에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운동을 좀 더 잘 하는구나.
그의 코를 세워주기로 한 어린 시절 친구들. 그 친구들 중 한 사람의 제안으로 단순한 호기심에 어떤 극단에 수능 두 달 전에 놀러 가게 됐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평생 연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음을 외쳤다. 내가 이 모든 걸 내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안배하셨음을 고백했다. 자기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그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중요한 순간마다 개입하고 계셨음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 같았다.
➅ 그는 감정과 믿음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자기 아내(박보경 배우)를 만나기 위해 분투했던 내용을 들려줄 때.
아내는 그에게 믿음을 가지기를 요구했다. 자기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면서.
그가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지면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믿음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자 친구에게 자기가 믿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이어 덧붙이기를, 그건 감정일 뿐, 진짜 믿음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사실은 속이는 건지도 모르면서 자기 아내를 그 때 당시 속인 거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도 자기 극단에 속한 크리스천 배우들이 주일에 연습 대신 예배를 선택할 때, ‘무슨 소리야, 주일에는 연습해야지, 주님도 다 이해하셔!’ 이런 식으로 얘기했기 때문이라고.
즉, 그에게 믿음이란 우선순위가 바로 정립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쳐올라올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영역이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➆ 그리고 그는 실제로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저녁 집회
목사님이 자기 딸 (이름이 나무다)과 운전 예화를 들려주셨을 때.
딸이 어리니까, 핸들 커버를 가지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고 집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자기가 운전을 잘해서 집에 왔다고 생각하는 모습.
아니, 내 모습이잖아?
나는 아직도 내가 선한 줄 안다.
내가 아직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진 것들, 내가 한 것들에 대해서 묵상한다.
내 선함이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무엇이 잘된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 순간에 내 인생을 운전하셨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차를 잘 운전해서 집에 오신 것처럼.
내 직장에서의 모습을 생각했다.
나는 직장에서 인정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 외에도 어떤 일이 잘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어쩌다 보니 하나님한테 그걸 맡겨드렸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해주신 게 아닐까, 생각하고, 진정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맡겨드려야지, 생각했다.
셋째 날
아침 시간. 덜 깬 몸을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데, 전도사님이 갑자기 아침 싱어를 섬겨줄 수 있는지 물어보신다. 목이 성하지 않은 상태다. 몸도 별로다.
마음에서 투쟁이 일어난다.
받을 이유는 이렇다: 섬길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을 때 나는 보통 후회하기 때문에. 또 전도사님의 사정을 헤아려 본다. 얼마나 급박하시면 복도에서 마주친 나를 붙잡고, 또 내가 목이 성치 않음을 아실 텐데도 섬겨달라고 말씀하시겠는가? 실제로 내게 부탁을 하는 전도사님의 목소리에 주저함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온다. 내가 어제 찬양 콘티를 못 봐서 찬양을 모른다고 하는데도 ‘아, 한 번 같이 확인해보시죠’라고 말씀하시는 게,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감당해주면 전도사님의 걱정 혹은 마음의 짐이 덜어지지 않겠는가.
받지 않을 이유는 이렇다: 주님, 저 진짜 많이 했잖아요. 좀 쉬고 싶어요. 그리고 저 지금 일어난 지 15분도 안 됐어요. 목이 성해지려면 시간도 더 있어야 하고, 간밤에 3시 넘어서 자서 잠이 충분한 상태도 아니에요. 찬양도 제가 알긴 하지만 – 그래도 잘 모르는 찬양이고… 원래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섬기기로 했는데 왜 저한테 부탁하시는 거죠? 길 가다가 왜 만나게 하셨나요 ㅠㅠ
→ 그런데 이걸 만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겠지? …그러면 그냥 해야겠다.
‘네, 섬길게요’
‘엇, 8시 반부터 리허설인데 오시겠어요?’
현재 시각 8시 28분
‘방만 빨리 정리하고 갈게요, 잠시만요’
쇳소리가 나는 목을 부여잡고 리허설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목이 불쾌한 파찰음을 내면서 음이 튀기 시작한다. 망했다. 쪽팔려서 어떡하나.
높은 부분을 좀 횟수를 덜어내자고 말씀드리고, 키를 조정할 수 있을지 논의한다…
리허설 시간이 부족했는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뿐.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그 효능을 믿는다.
목에 손을 올리고 예배당 구석 의자에 앉아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갑자기 저한테 이런 거 시키셔서 제가 합니다.
제가 무대에서 삑사리 나서 쪽팔리는 것도 걱정되지만,
제가 그렇게 불러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해되는 사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 말고 저 사람들 봐서라도 제 목이 괜찮아지게 해주세요.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와- 건반 누나가 키를 한 키 낮추기로 했다고 한다(할렐루야).
그리고 실제로 목이 찬양을 부르면서 점점 괜찮아졌다. 덕분에 오후 예배까지도 수월하게 마쳤다.
하나님은 진짜로 살아계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
우스갯소리 아니라 진짜야.
앞서 얘기한 것처럼 목이 쉬는 게 늘 걱정이었는데, 이번 수련회에서는 목이 심하게 쉰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예방을 위해 용을 쓰기도 했지만… 주님께서 염려하는 걸 아시고 내게 좋은 것들을 허락해주셨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수련회 내내 큐티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심에 감사드린다.
또 아침 순서- 팀 나눔-을 하면서 우리 공동체 사람들 얼굴을 다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또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 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아름다운 모임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온다.
하나님이 넣어주시는 마음인 것 같다.
또 한 번 갈렙에 애정을 갖게 됐구나: 이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갈렙을 조금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겠구나.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 갈렙 섬김이 마지막인 진우 형, 그리고 예린 누나와 이야기하며 왔다.
공동체를 사랑하고 찬양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오니까 정말 채워지는 느낌(이건 감정이다)이 들었다. 이런 시간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셔서 감사했다.
마지막 예배, 목사님의 비유,
불이 붙으려면 마른 장작이어야 한다.
자꾸 자기의 죄를 스스로에게 끼얹으면서 스스로를 젖은 장작으로 만들면
불이 붙을 리가 없다.
자기를 마른 장작으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
: 근래 들은 비유 중 가장 정확하고 명징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건조함을 유지해야 한다.
나는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됐다.
지금 내가 겪는 시련이 있을 터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를 인내하면 우리는 이것이 연단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그 끝이 소망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 시련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인내하자.
하나님이 내게 행하실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갈렙 공동체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그 마음을 내게 넣어주시니까, 나도 갈렙을 이전보다 더 아끼게 됨이 감사하다.
그리고 내게 무엇보다도 찬양 사역을 할 수 있는 통로를 허락하시고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이걸 통해 내가 생명을 얻음이 느껴진다.
하나님이 앞으로 나를 어디에 처하게 하시든지 내게 하나님의 생명력과 동행하심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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