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137 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올바릅니다.
138 주께서 정하신 교훈은 의롭고 모두 믿을 수 있습니다.
139 내 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었기에 내 열정이 나를 지치게 했습니다.
140 주의 말씀은 매우 순결합니다.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합니다.
141 내가 낮고 비천하다 해도 주의 훈계를 잊지 않았습니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하고 주의 법은 진실합니다.
143 고난과 번민이 나를 사로잡아도 주의 계명은 내 기쁨입니다.
144 주의 교훈의 의는 영원하니 내게 통찰력을 주소서. 그러면 내가 살 것입니다.
145 오 여호와여,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겠습니다.
146 내가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을 지키겠습니다.
147 내가 동트기 전에 일어나 부르짖었으며 주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148 내가 주의 약속을 생각하느라 한밤중에도 눈을 뜨고 있습니다.
149 주의 인자하심으로 내 소리를 들으소서. 오 여호와여, 주의 약속대로 나를 되살리소서.
150 악한 계략을 짜는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의 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151 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고 주의 모든 계명은 진실합니다.
152 주께서 그 교훈을 영원히 세우신 것을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시편 119:137~152, 우리말 성경)
묵상
139 내 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었기에 내 열정이 나를 지치게 했습니다.
(시편 119:139, 우리말 성경)
⮑ 이게 무슨 말일까?
내 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은 것과
내 열정이 나를 지치게 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시편 119:139
해설을 보니,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은 것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로부터 의도적으로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배제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 진리가 조롱받고 무시당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 마음이 타들어가는 모양을 일컫는 말이라고..
140 주의 말씀은 매우 순결합니다.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합니다.
141 내가 낮고 비천하다 해도 주의 훈계를 잊지 않았습니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하고 주의 법은 진실합니다.
143 고난과 번민이 나를 사로잡아도 주의 계명은 내 기쁨입니다.
(시편 119:140~143, 우리말 성경)
⮑ 하나님의 말씀(진리)은 좋은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진리를 밀어내는데,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를 진리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진리는 다른 곳에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우리나 (편의를 위해 분리하자면) 진리의 구도자인 건 마찬가지다.
인간은 어디에 있든지 자기의 근원과 존재의 번성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는 건 모두가 같다.
그리고 세상도 우리도 한 사람이 모여 만들어 낸 집단임을 생각해본다면,
각자가 저마다의 진리를 좇아 달음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마다의 진리’라는 말은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진리는 ‘저마다’일 수 없다. 진리는 개인의 생각과 별개로 부유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황금이다.
내 생각이나 관찰과 상관없이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진리는 그렇게 존재한다(양자역학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만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오해할 수는 있다. 그런 오해는 생각보다 잦고,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역사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다.
나는 진리의 배격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이 진리를 더 많이 알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있고,
진리를 의도적으로 쫓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지닌 이를 보면 애달프다.
그런데 내 마음이 타들어가기까지는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정말 좋은 것이지만,
나는 어떤 좋은 것이 한 사람에게 찾아갔을 때
그 사람이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자
실제로 좋다고 받아들이기까지 해야
비로소 좋은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좋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물론 진리에 엄격한 면이 있다. 또 진리는 그 속성상 자신이 아닌 것들을 배격한다.
그리고 그 배격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에 대해,
진실의 손아귀 그 자체인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필요하실 때 돌려세우신다고 생각한다.
나는 삶으로 복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삶이 죽어 만들어진 ‘말(Word)’로서 복음을 담을 때
그 안에 복음이 다 담기지 않을 때가 있고,
그런 복음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생채기를 낼 때가 있으며,
말이 다 들어가도 삶으로서 증명되지 않았을 때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말이 너무 중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말로 전한 복음이 삶에서 부루퉁한 표정, 기계적 불평, 인색한 태도, 업신여기는 언행으로 치환됐을 때
나에게는 내가 말로 전했던 복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각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하는 주어진 때가 있다.
진리는 수많은 층위가 있고, 아직 그 층위는 진리를 쫓아가는 나를 향해서도 열리는 중에 있다 – 어떤 것들은 열렸고, 어떤 것들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 문을 여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묵묵히 문이 열리길 기다리면서, 이미 열린 문들을 내 삶의 발판을 삼는다.
그리고 그 발판이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 문이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기도
하나님, 오늘은 짧은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세상의 진리를 향한 태도, 그런 세상을 향한 내 감정과 태도,
말씀 한 구절은 하나의 장면을 보여줬지만, 여러 부분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당신의 말씀을 향해 열 수 있는 문을 두시고,
내가 그 문을 열고 안에 든 것을 마주할 용기를 지녔을 때 그것을 여셨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일찍 여시는 법도, 너무 늦게 여시는 법도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당신의 가르침으로 어제보다 조금씩 더 지혜로워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아주 작은 데서 출발해 아주 큰 데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대해 다 담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열리지 않은 문을 보고 조급해하지 않게 하시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해내야 할 숙제처럼 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존귀하게 대하시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듯 대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내가 그 눈을 받아 그를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하나님으로 인하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는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적용
- 존귀 챌린지는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된다 (4회). 화가 날 때 존귀 챌린지를 생각하기.
답글 남기기